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왔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울화통이 터지고, 내가 대한민국 사람이란게 참 부끄럽더군요.
그래서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잠깐 찾아보았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그 사건은 무엇인가?
전두환이 1980년 5월17일 전국에 계엄령을 발표합니다. 여기서 계엄령은 국가비상사태 때 병력(兵力)으로써, 개인의 기본권의 일부에 대하여 예외조치를 할 수 있는 법제도(法制度). 를 말합니다. 그리고 1980년 5월18일 전라도 광주는 피로 물들게 됩니다.
이당시 광주에서 시위와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김대중이 전두환의 독재정치와 관련해서 위험적인 대상이었으며, 김대중을 지지하던 지역이 전라도 였습니다.
그로인해 전라도 광주사람들을 빨갱이로 몰고 죄없는 시민들을 총으로 쏘고, 벌거벗은채로 길거리에 질질 끌고 다니며, 몽둥이로 시민들을 무참히 때려 강제로 진압할려구 한 사건으로 간략히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시위하던 사람들만 죽인것이 아니라, 아무상관없는 사람도 전부 죽이고, 심지어는 새생명과 임산부를 죽이는 끔찍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광주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으며, 빠져나가게 될경우 민심이 안좋아 지기때문에 벙어리며 편지며 전화까지 봉쇄되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말하길 광주에는 죽은 사람이 없다고 방송을 하고, 보상은 커녕 무참히 짓밟힌체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알려면 먼저 12.12사태를 알아야 합니다.
10·26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살해된 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 등의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도록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몇사람의 권력을 위해 희생되는 현실을 참을 수 가 없어서 1980년, 여러곳에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마침내 전국의 비상계엄령이 공포 되었고,
18일..
피로물든 광주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80년 5월 18일
00: 05
광주 지역 민주 인사 등 연행
01: 00
광주 일원 공수부대 투입
02: 00
계엄군, 전남대·조선대·광주교대 점령 학생 112명 체포
08: 00
전남대 등 대학교 휴교령(9월 10일까지), 광주·송정·목포 등 고교 휴교령
09: 00
전남대생들 등교 시작
10: 00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 50∼60명과 공수대원 대치
10: 20
전남대생 5백 명 공수부대와 투석전 충돌, 전남대생 계엄 철폐를 외치며 도청으로 진출
10: 30
전남대 후문 시민 연행
10: 50
광주역 앞 전남대생 2백 명 집결
11: 00
시위대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앞 연좌 시위
11: 15
시위대 충장로파출소 앞 대치 후 파출소에 투석
11: 30
시위대 가톨릭센터 앞 대치, 연좌 농성
14: 30
동국대 주둔 공수 11여단 광주로 출발
14: 42
도청 앞·금남로 일대 1천 5백여명, 충장로 일대 1천 6백여 명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진압 실패, 7공수 35대대, 31사단 96연대로부터 도청 앞 진압 명령 수령
15: 00
공수부대(7공수) 시내 투입, 진압 작전 실시
- 가톨릭 센터: 33대대
- 충장로: 33대대
- 시위 군중 체포(337명)
- 공중에서 헬기 3대 선회
21: 00
통금 실시, 전국에서 소요 주동자 544명 검거(광주 연행자 477명)
◈ 80년 5월 19일
00: 05∼05: 20
11특전여단 광주 도착, 진압군 재편성
08: 00
계엄사, 민주 인사 및 학생 549명 검거 발표(전국 총계)
09: 00
금남로에 군중들 운집 시작
11: 00
시위 진압 탱크 동원 공수부대 잔혹한 구타, 연행, 총검 사용, 체포된 시위대를 발가벗겨 무릎을 꿇게 한 뒤 머리를 땅에 처박게 하고 군화로 전신 구타. 광주 시내 초등학교 수업 중단 조치, 중·고등학교 귀가 조치
11: 20
도경 작전과장 데모대 놓아주었다고 동구청 입구서 계엄군 하사 등으로부터 집단 구타, 곳곳 부상자 속출
12: 00
수업 받던 학원생 연행
11: 30∼13: 00
시위대 107명 연행
14: 50
일반 시민들의 합류로 시위대 급증
16: 50
최초의 발포: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 동원빌딩 앞에서 고장난 장갑차 1대, 시위대 150여 명이 접근하자 장갑차에서 발포, 4명 중상, 일부는 계엄군이 싣고 감
17: 40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시위대 완전 분산(비가 내리기 시작함)
18: 00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주차장에 시체 7∼8구 목격됨. 광주공원 시위대 수천 명 '전두환 타도'외침
19: 30
전대 의대 앞 골목길서 최미자양(당시 19세) 계엄군 대검에 가슴 짤림
21: 00
통행금지에도 불구하고 시위 지속
23: 08
3특전여단 광주에 투입
◈ 80년 5월 20일
04: 00
시민 궐기문 살포됨
07: 20
서2동 전남주조장 빈터에서 대검으로 난자, 살해된 월산2동 김행부씨(36)가 변사체로 발견됨. 오전 대체로 소강(비가 오는 날씨)
10: 00
대법원 김재규 등 5명에 사형 확정
10: 20
금남로 3가 30여 명의 젊은 남녀가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알몸으로 붙잡혀 기합받는 것이 목격됨. 오전 외신기자, 독일 NDR·ADR TV 유르겐 힌츠페터 광주 도착
14: 20
서방 삼거리 공수부대의 화염방사기에 사망·부상자 발생, 광주역 부근 택시기사 20여 명 조직적 대응책 논의, 금남로 일대 제3공수 11대대 15만 군중에 포위당함
16: 20
가톨릭센터·광주고·충장로·금남로 등지에 시위 학산, 시위대가 도청을 향하는 6개 방면 모든 도로에 밀어닥침
17: 50
충장로 시위대 육탄으로 경찰과 충돌, "광주 시민을 적으로 취급하는 군과 사생결단을 낼 테니 경찰은 비켜달라"협상시도
18: 20
택시기사 시위 참여. 택시 1백 대가 3줄로 광주역 쪽으로 진출
18: 40
전남대 앞 5백 미터 지점, 계엄군 1명사망, 광주역 쪽에서 택시·화물트럭을 앞세운 시위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집결
18: 50
택시 120대, 화물트럭·버스 20대 라이트 켜고 금남로 차량 시위. 시민 2만 명 뒤따름
19: 45
도청 광장 공수부대 포위됨. 시위대 태극기를 흔들며 도청으로 진격
20: 00
시위대 MBC 방송국 점령. 체포된 시위대 도청으로 연행. 소방서 시위대 점령. 2∼3대의 소방차 도청 앞 6백 미터 지점까지 돌진. 계림동 시위 군중 1만∼3만 증가(도청 진격), 전남대 병원 앞 1만 증가(도청 진격)
20: 10
노동청 앞 시위대 MBC에 화염병 투척,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시위대에 화학탄 발사
20: 50
시위 군중 시청 점령
21: 00
도청 차고 불탐, 외곽 지역 주유소에서 화염병 제작, 노동청 앞 시위 진압 경찰 4명 사망
21: 40
MBC 방송국 전소
22: 00
심야로 이어지는 투쟁 대열. 광주 시내 모든 거리는 시위 군중 10만 명 이상 운집. 광주역에 투입된 31사단 병력 퇴각, 금남로 3공수 11대대 고립 상태, KBS 앞 3공수 15·12대대 2만 명 시위대와 대치. 전남대 입구 16대대 1백 대 차량과 시위대와 대치. 광주시청 13대대 1만여 명 시위대와 대치. 양동복개상가 20∼30명의 계엄군 시위대에 포위당함
◈ 80년 5월 21일
00: 10
계속 대규모 시위, 전옥주씨 조선대 앞 스피커로 "전두환 물러가라"외치며 시위 주도
00: 20
조선대 쪽 계속 총소리
01: 00
31사단 화염방사기 소대 출동
02: 10
3공수여단, 광주역에서 전남대로 퇴각02: 13 시외전화 불통으로 외부와의 연락두절, 광주 지역 일반 전화선을 지시에 의거 단선 조치
02: 30
계엄군 20사단 사령부 및 62연대 용산역 출발
05: 00
시위대, 2.5t 트럭에 시체를 운반
05: 50
광주역에서 출발한 시위대 1천여명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연좌 농성. 아침: 계엄사령부 최초로 광주에서 유혈 충돌 공식 발표08:00
시위대 당국과 협상 시도
08: 50
시위대 광주교도소 기습, 자진 철수
08: 58
20사단 사령부 송정리 도착
09: 00
시위대 아시아 자동차 공장 진입. 대형버스 22대·장갑차 3대·군용 트럭 33대·민간트럭 20대를 몰고나와 도청으로 진격, 버스는 외곽에서 도청으로 시민들 수송, 군인의 과잉 진압 사과 요구, 현정부 규탄, 뉴욕 타임스 특파원 심재훈, 르 몽드지 필립 퐁스 광주 도착
09: 20
한국은행과 가톨릭센터 사이 5천이상 군중, 시체 2구 손수레에 싣고 마이크로 "계엄군은 시체 인도하라"고 주장
09: 50
시민 대표와 장형태 도지사의 협상
10: 30
군헬기 4대가 도청·조선대·전남대에 이·착륙하며 도청 지하실에 모아놓은 시체와 진압 무기, 주요 기밀 서류 공수 시작. 계엄사령관 담화문 발표
10: 48
군헬기에서 "공수 병력 철수시키겠다"방송. 도지사·시장도 설득 방송
10: 56
계엄군 서울로부터 코와 귀를 자극하는 CS액 수송
11: 00∼12: 00
동별로 시위대에게 음식 제공
11: 30
전남 지역 학생 총연맹 명의로 '오후 2시 도청 앞에서 도민궐기대회를 갖자'는 전단 배포. "전남대생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조선대생은 계림파출소, 서강실업과 간호대는 MBC 방송국, 고교생은 산수 오거리, 시민은 도청으로 집결하라"
11: 50
가톨릭센터 앞 벽보 부착: '때려잡자 전두환, 물러가라 최돼지, 사라져라 신현확, 비상계엄 해제하라, 칼부림이 웬말이냐, 너와 나 형제 지방색 타격.'
12: 00
2시까지 퇴각하겠다던 계엄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분노한 시민들이 차량을 앞세우고 도청으로 진격. 공수부대 분수대까지 퇴각. 최초의 집단 발포, 시민들은 공포탄인 줄 알았으나 도로의 시민들이 쓰러짐. 부상자를 구하려는 시민들에게까지 사격. 계엄군은 도청과 수협·전일빌딩 옥상에서 정확한 조준 사격을 함. 전남대 정문에서도 발포. "러닝 셔츠만 입고 한 손에 태극기를 든 청년이 탄 장갑차가 도청을 향해 질주해갔다. 그때 도청 쪽에서 한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공수부대의 조준 사격이었다"(증언). "고막을 찢는 듯한 총성과 함께 장갑차에 탔던 청년이 총탄에 맞고 그대로 넘어졌다. 당시 사상자가 얼마였는지는 취재가 불가능"(월간조선, 1985.7)
12: 10
돌진하는 시위대의 장갑차에 계엄군 4∼5명이 쓰러짐. 계엄군은 살상을 예고하듯 분수대 앞에 횡대로 도열
12: 30
분노한 시민, 각목을 든 채 도청을 향해 돌격. 비무장 시민에게 발포. 시위대 맨 앞의 503벤츠 고속버스가 군경의 저지선으로 돌격하자 계엄군 쪽에서 LMG기관총 난사, 차에 탄 시위대 20여 명 살상당함
12: 40
버스 4대 화순 중앙파출소에 방화. 주민 합세 후 무기 탈취
12: 45
시민에게 본격 발포(전교사 작전 일지 80-4호)
12: 55
도청 앞 YMCA에서 계엄군 발사, 시민 수십 명 살상. 분수대 앞 계엄군은 횡대로 앉아 금남로 쪽을 향해 거총 자세
12: 58
광성여객 버스 2대가 도청으로 진격. 공수부대 발포. 운전사 사망. 장갑차 1대가 도청으로 진격, 집중 사격을 받았으나 학동 쪽으로 빠져나감
13: 00
무장을 시작한 시위대
13: 40
군용헬기 1대 도청 광장에 착륙, 일반 계엄군 9명 태우고 이륙, 도청 광장 임시 헬기장이 돼 군용기와 경찰 헬기가 수시로 이·착륙, 공수부대로 부상자와 중요 문서 이송
13: 50
전남도청에서 도지사가 시위 군중에게 요구 사항을 승낙할 테니 해산하라고 방송
13: 55
"3시까지 연행자를 석방한다"라고 군용헬기 선무 방송
14: 00
월산동 로터리와 전남도청 부근 헬기 기총 소사
15: 00
광주 시내 종합·개인 병원 총상 환자들로 가득 참
16: 30
광주 지역 공수대원 철수 명령
17: 00
시민군 총기 교육 후 지역방위대 편성, 광주 공원 광장에서 특공대 편성, 헌혈하고 돌아가던 박금희양 총에 맞아 즉사, 도청에 남은 계엄군 화순 주남마을 쪽으로 철수
24: 00
외신 기자, AP통신 테리 앤더슨, 타임지 사진기자 로빈 모야 광주 도착
◈ 80년 5월 22일
00: 05
완도 경찰서 파괴
03: 00
영광 1천여 명 시위 후 해산
04: 55
계엄군 증원 병력 광주 도착(20사단 60연대)
05: 00
남평에 매복중인 계엄군의 사격으로 사망 1명, 부상 3명
07: 30
전남대 교정에서 암매장된 고교생 발견. 아침 뉴욕 타임스와 르 몽드지 1면 머릿기사, 최초로 세계에 알려짐
08: 10
도청 간부 수습 대책 논의
09: 30
계엄군 피란 행렬에 집중 사격
10: 30
2군사령부 자위권 행사 지시. 목포 일부 파출소 피탈
12: 00
도청 앞 5만 시민궐기대회 개최. '5·18수습대책위원회'결성. 전남일보 현관에서 무기 회수
12: 12
함평 경찰서 점거. 시위대 수천 명 시위
12: 00∼15: 00
수습위원 계엄사 방문, 협상 결렬
13: 00
무등도서관 앞 1명 사망
13: 16
화순-광주간 도로에서 공수부대, 차량 1대 사격, 1명 사망, 7명 체포
14: 00
목포역 광장 시민궐기대회
14: 30
광주시장이 비행기에서 호소 전단 살포, 박충훈 총리 호소문 발표
15: 00
도청 앞 시민궐기대회 개최, 매일 오후 3시와 9시 2차례 도청 앞 분수대에서 궐기대회 개최 결정
15: 18
관 위에 태극기를 덮은 시체 18구 도청 분수대에 안치. 추도식 거행
16: 00
부상자를 위한 모금 운동
16: 30
영암 지역 무기 회수 시작
17: 00
계엄사와 협상 결과 보고. 통합병원 통로에서 62연대 2대대와 시민군 교전: 사망 3, 연행 25, 부상 10명
17: 55
848명의 연행 시위대 석방
18: 00
학생수습위원회 구성. 도청 상황실에서 증명서 발급. 쌍촌아파트 교전
18: 30
공수부대 화순 너릿재 터널 트럭으로 봉쇄. 전대병원 시체 18구 도청 분수대 앞으로 옮겨 추도식. 관구입을 위한 모금 운동 전개
19: 10
사망자 56명, 도청 앞 광장에서 관을 놓고 추도식
22: 00
무기 회수를 둘러싼 시민군 내부 대립 심화
◈ 80년 5월 23일
01: 20
해남 우슬재에서 교전. 시위대 20명 이상 사망. 다수 부상
06: 00
광주시 안정 회복. 남녀 고교생 7백 명 시내 전역 청소. 장례반·총기 회수반·차량 통제반으로 구분. 도청 중심으로 대자보, '민주시민강령'선포
1.시민은 시민군을 믿고 적극 협조합시다
2.시민군은 위장된 계엄군 및 불순분자를 주의합시다
3.질서 회복에 힘씁시다
4.평소 생활로 복귀합시다
07: 00
시청 직원과 시민들 거리 청소에 나섬
09: 00
녹두서점에 모인 교수·학생 시민궐기대회 계획. 학생들 무기 회수. 구용상 광주시장 전직원 정상 근무 지시
10: 00
수습대책위원회 조직 개편, 현재까지 파악된 사망자 전대병원 26명, 기독병원 17명, 적십자병원 21명, 조대병원 1명, 요한병원 2명, 기타 3명, 도청 내 44명 등 114명
10: 05
전남대 구내에서 교련복 차림 남자 고교생 가매장돼 있는 것을 도청으로 운구
12: 00
8백여 정 총기 회수, 차량 통제반 차량 단속
13: 00
계엄사 연행 학생 34명 석방
14: 00
주남마을 양민 학살. 18명 사망. 수습위원 10명 무기 1백 정 반납
14: 20
학생들 시민 시체 50구 상무관서 분수대로 운구. 시민 2만 명 운집
15: 00
제1차 민주 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장례 준비 모금 운동 전개해 1백만 원 대책위에 전달. 지원동 버스 종점에서 총격전. 계엄사 붉은 글씨의 경고문을 전역에 살포
16: 00
지원동 민가에 계엄군 난입, 시민을 향해 난사.
19: 40
계엄분소는 수습위원들에게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927명 연행해 882명 훈방하고 23일 34명을 석방해 현재 45명만 남아 있다고 발표
21: 00
목포역 시국성토대회. 5만여 명 횃불 시위
◈ 80년 5월 24일
새벽
외곽 지역을 돌아다니며 무기 회수(조비오 신부 등 수습위원 4명)
06: 00
무기 2천 7백 정 회수(50%)
08: 00
광주 시내 생필품 품절. 무기 자진 반납 시한 12시까지 연장. 수습위 사망자 확인·미확인 합쳐 6백여명. 중경상자는 2천여 명이라고 발표
09: 00
충정작전을 위한 계엄군 배치
10: 30
계엄군의 오인 사격. 31사단 96연대 3대대와 기갑학교 병력 사망 5, 중상 11, 경상 11명, 주남마을 유일한 생존자 홍금숙양 헬기로 후송
12: 00
시체 3구 암매장한 계엄군 무선교신 도청
13: 00
계엄사, 무기 반납 시한을 18시로 연장. 11공수 주남마을서 철수 개시
13: 10
공수부대 철수하면서 좌우 난사. 원제마을 저수지서 멱감던 방광범군(당시 10세) 숨지고 10분 뒤 진제마을에서 총소리 피해 달아나다 벗겨진 고무신 주우려던 전재수군(당시 10세)이 총에 맞아 사망
14: 05
계엄군의 오인 사격. 효천역 전방 1Km 지점 11공수와 보병학교 병력 사망 9명 부상 33명 발생, 진월동 양민학살 2명 사망
14: 10
북동에서 학생 가장한 불량배가 주민들에게 금품을 강요한다는 제보 받고 시민군 출동
15: 00
수백의 공수대원 송정리 비행장에서 이동. 송정리에서도 헬기 기총소사. 제2차 민주 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전북서 환자용 산소 1백통 지원
16: 30
도청 앞 상무관에 미확인 시체 40여 구 안치
18: 49
계엄분소 예하 각 부대에 확인 사살과 이동시 표식을 달 것을 지시
21: 00
민간인으로 위장 계엄군 시내 투입
◈ 80년 5월 25일
08: 00
조작된 독침 사건 발생
11: 05
초교파적인 모금 운동. 시체 120구로 늘어남
12: 35
목포. 비상구국기도회 열림
13: 10
목포서 기독교인 1천 명 시위 이어 목포역 광정서 구국기도회
13: 35
피란가던 청년 2명 산 속에서 사망
14: 20
화순 방면 1번 버스 종점 부근서 시체 2구 발견됐으나 계엄군이 인도 거부
15: 00
제3차 민주 수호 범시민궐기대회. 궐기대회 후 검정 리본 착용. 가두 시위
19: 00
광주시 영세민에게 가구당 5천 원씩 지급. 정부미 6천 가마 방출
20: 00
계엄사, 광주 다시 악화됐다고 발표
◈ 80년 5월 26일
04: 00∼06: 00
외곽 지역 주둔 계엄군 광주 진입
05: 00
시민수습대책위 17명이 '총알받이로 나가 계엄군을 막자'고 결의. 진입 현장에서 탱크 앞에 드러누워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
07: 20
계엄군의 시내 진입을 알리는 방송
11: 30∼13: 00
제4차 민주 수호 범시민궐기대회
15: 00
제5차 민주 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우리는 왜 총을 들게 되었나' 낭독. 7공수 광주공원 소탕 명령 받음
16: 00
광주 상황을 알리기 위해 탈출(김요셉)
19: 00
외국인 207명 광주에서 철수
21: 00
전교사 문관 도청 잠입. 지하실 TNT 뇌관 분리 제거 후 복귀. 특전대 하사관 시내 사복 정찰
23: 00
시민군 병력 배치. 계림초교 30명, 유동 삼거리 10명, 덕림산 20명, 전일빌딩 40명, 전대병원 옥상·서방시장 10명, 지원동 30명, 도청 2백∼3백 명
◈ 80년 5월 27일
00: 00
시내전화 끊김, 특전사 특공대 행동 개시
02: 00
20사단 행동 개시, 계엄군의 진입을 알리는 가두 방송
03: 30
계엄군 광주 전격 기습
04: 00
31사단 무등경기장 중심으로 행동개시. 7공수 광주공원 도착. 11공수 관광호텔·전일빌딩 점거. 도청 앞 완전 포위. 금남로 중심 시가전
04: 10
3공수 도청 후문 월담. 도청 총격전
04: 30∼06: 30
도청 함락
05: 00
계엄분소장 담화 발표. 광주 KBS 행진곡과 함께 군의 진입을 알리는 방송 되풀이
05: 23
광주시 점령 완료
06: 00
KBS를 통해 '폭도들은 진압됐다. 시민들은 위험하니 집밖으로 나오지 말라' 방송 (영어)
07: 30∼09: 30
기갑학교 전차 14대 A.P.C. 1대 무력시위. 공무원 근무개시, 시내전화 개통
08: 00
광주경찰서 노병기 경장 풍향동서 출근길에 총탄 맞고 사망
08: 40
도청 안에 시체, 회의실 앞 분신소 시체 1구, 뒤뜰에 1구, 민원실 계단 앞 5구, 건물 사이 7구, 경비과 옆 1구 등 총 15구
10: 30
도경 지하실에 숨어 있던 고교생 등 7명 생포
11: 00
목포, 제5차 민주 헌정 수립을 위한 목포시민궐기대회, 시내 주요 건물 옥상 점거
12: 00
장형태 지사 의원 면직, 후임에 김종호 금호실업 대표
22: 50
목포 시민, 3천 5백여 명 횃불 시위.
28일 새벽 4시경
시위대 체포·연행으로 목포 시위 막내림
사실 그때당시 사병으로 근무했던 군인보다도 위에서 자기의 권력을 챙겨먹는 이기적인 윗대가리들이 잘못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가끔 보면 그사건이 폭도라고 말씀하시던 분이 있는데, 그럼 어린아이와 아기 그리고 힘없는 임산부를 죽인건 무슨이유인지요?
설마 어린아기가 총들고 시위를 했다고 보시는건 아니겠지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다시는 이런 사건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과, 그때당시에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납니다.